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 공방전 (문단 편집) === 유비 북진 ===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삼국지)|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 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 >《정사 삼국지》 선주전 ---- >(건안 22년(217년) 10월), 유비는 그(법정)의 책략이 훌륭하다고 여기고 이에 제장들을 인솔하고 군사를 한중으로 진군시키고 [[장비]], [[마초]], 오란 등을 파변하여 하변(下辯, 량주 무도군 하변현)에 주둔시켰다. 위왕 조조가 도호장군 조홍을 파견하여 그들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 >《자치통감》 68권 ----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자 태조는 조홍(曹洪)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조휴]]를 기도위로 임명해 조홍의 군무에 참여케 했다. 태조가 조휴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참군(參軍)이지만 실제로는 장수(帥)이다.” 조홍이 이 영을 듣고 조휴에게 군무를 맡겼다. >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固山)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聲勢)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進兵)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태조가 한중을 함락시키고 제군(諸軍)이 장안으로 돌아온 뒤 조휴를 중령군(中領軍)에 임명했다. >---- >《정사 삼국지》 조휴전 ----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下辯)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 >(중략)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고 그 장수 임기(任蘷) 등을 참수했다. >(중략)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陰平)의 저(氐)족 강단(強端)이 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 >《정사 삼국지》 무제기 ----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고도 이 기세를 틈타 파(巴), 촉(蜀)을 도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을 남겨 둔수(屯守)케 하고 자신은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모가 미치지 못하거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시 내부에 우환이 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의 재략(才略)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장수(將帥)들보다 낫지 못하니 군사를 일으켜 가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는 때에 이르러 농업을 일으켜 곡식을 쌓고 (저들의) 빈틈을 엿보고 기회를 노린다면, 상(上)으로는 구적(寇敵)을 무너뜨려 왕실을 받들거나, 중(中)으로는 옹주, 양주를 잠식해 영토를 넓힐 수 있고, 하(下)로는 요해지를 굳게 지키며 오래도록 유지하는 계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 >《정사 삼국지》 법정전 217년(촉서 법정전, [[화양국지]] 유선주지,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해 10월), 또는 218년(촉서 선주전), 유비는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한다. 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이 선주(유비)를 설득하여 선주가 좋게 여기어 출진하였다고 하고, 또한 법정이 종행(從行, 수행)하였다 하니 유비의 북진에는 법정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법정이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유비세력은 적벽 이후 계속 연이어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장수들도 연이어 승리하면서 전체적인 역량이 증진되어 조조군과의 전투에서도 탕거의 승리뿐만 아니라 황권이 조조에게 장로와 함께 투항하여 파군일대를 수비하던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또 황권은 하후연을 치고 한중을 정벌할 플랜을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 전략이 실행될 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조조 세력의 내부 문제였다. 그동안 한실을 위해 협천자한다던 조조의 무리한 위왕 즉위는 내외적으로 조조세력에 엄청난 우환을 안겨 줬는데, '''당시 '왕'의 작위는 유씨 황족에게만 내려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창업자 [[한고조]]가 죽음을 앞두고 황실과 외척, 공신들에게 백마의 피를 마시며 맹세시킨 내용, 이른바 백마지맹白馬之盟의 내용이 바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치고, 공로가 없는 자가 제후가 되어도 천하가 함께 그를 친다"''' 였다. 실제로 고조가 죽은 직후 [[고황후 여씨]]가 외척인 여씨들을 왕으로 봉해 [[날먹]]을 시도했으나, 여후가 죽자마자 고조의 남은 공신들이 이 백마지맹에 의거해 여씨들을 천하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죽였고, [[왕망]]도 찬탈 직전까지 공작위에 머물렀으며, [[동탁]]이나 [[이각]], [[곽사]] 등 조조 이전의 실세들도 상국이니 대장군, 대사마 등 번쩍거리는 관직은 차지했을지언정 왕위는 노리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관직'들은 공이 크다고 주장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지위였으나, 공의 많고 적음을 떠나 '''황족이 아니면서 왕이 되는 건 그 자체로 반역'''이었으니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였던 것. 이로 인해 의문을 가졌다는 이유로 최염이나 모개 같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료들이 숙청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위왕으로서의 봉국인 업에 가 있을 때 한실의 친위세력들이 허현에서 반조조의 기지를 들고 조조는 한실을 겁박하는 역적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운 유비세력과 협조해 조조를 몰아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감에 휩싸인 조조는 허현의 조정관료들을 반란자로 몰아 대다수를 처형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외부에선 배잠의 통치에 반발한 오환족과 선비족이 하북을 침입하자 아들인 [[조창]]을 파견하는 등 이족의 침입이 잇달았고 손권과도 전투를 벌어고 있는 상황에서 조조 세력은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때 앞서 먼저 군대를 보내 무도 땅에 들어가게 하는데 이때 언급되는 이름이 장비, 마초, 오란, 뇌동 등등이다. 전부 주둔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도 하변에 자리를 잡긴 했으나 [[조홍]]과 [[조휴]] 등의 활약에 물러나게 된 듯 보인다. 오란은 격파되어 죽었고 장비, 마초는 퇴각하였다. >유비가 진식(陳式) 등 10여 영(營)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끊자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이를 쳐서 깨뜨렸는데, 적은 스스로 산과 계곡에 투신해 죽은 자가 많았다. >---- >서황전 보낸 진식도 서황에게 깨진다. 이는 전투가 치열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한중지역 총사령관 [[하후연]]의 지휘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그는 장합을 광석에 주둔시켜 공격하는 유비의 주력군을 상대하게 하고 서황을 보내 마명각도를 끊어 한중일대의 조조군의 연락, 행군체계를 꺾으려 했던 시도를 막아냈던 것이다. 유비군 역시 마초와 저족의 능력을 이용해 무도와 하변을 찔러보고 양평관에 주둔해 마명각도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는 등 다양한 전술적 시도를 보여 주었다. 어쨌거나 하변에 보냈던 병력이 쫓겨나자 유비는 양평관에 자리를 잡게 되고, 이에 하후연도 군대를 이끌고 와 양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게 된다. >건안 23년(218년), 유비가 양평관에 주둔하자 하후연들이 제장들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서로 지키면서 해를 넘겼다. >---- >《정사 삼국지》 하후연전 ---- >장합이 광석에 주둔하였는데, 유비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자 못하자 급히 편지를 보내어 익주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했다. >---- >《자치통감》 68권 ---- >유비는 한중을 차지하려고 다툴 때, 긴급 문서를 내려 병사를 보낼것을 요구했다. 군사장군 제갈량은 이 문제를 양홍에게 물었다. 양홍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한중은 익주의 인후로서 존망의 기회가 되는 지역입니다. 만일 한중을 잃는다면 촉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각 가문의 화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남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여자는 수송을 담당해야 하는데, 병사를 파견함에 있어 무엇을 의심합니까?" 당시 촉군태수 법정은 유비를 수행하여 북쪽으로 갔었다. 제갈량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양홍에게 촉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양홍은 각종 사무를 모두 처리했으므로, 결국에는 정식으로 태수가 되었다. >---- >《정사 삼국지》 양홍전 당시 유비는 [[법정(삼국지)|법정]], [[황권]] 등을 작전참모로 데려가고 제갈량에게 성도를 맡겼었다. 그 후 따로 연락을 취해 병력을 추가로 보내줄 것을 말했는데, 익주내에는 유비가 한중으로 이동한 사이 도적의 무리인 마진과 고승이 수만의 무리를 일으켜 소란을 부리고 남부에선 이족인 고정이 소란을 부렸다. 제갈량이 [[양홍(촉한)|양홍]]에게 어찌해야 할지 묻자 양홍이 대답하길, "한중은 익주의 인후로서 존망의 기회가 되는 지역입니다. 만일 한중을 잃는다면 촉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각 가문의 화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남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여자는 수송을 담당해야 하는데, 병사를 파견함에 있어 무엇을 의심합니까?" 라고 답하였고 이에 제갈량이 곧바로 지원병을 파견하였다.[* 이 질문의 본의는 촉 출신의 양홍을 통해 촉의 원주민들이 완벽하게 유비군에 동화되었는지를 알아보는 데 있었다.] 당시 촉군에게 한중의 존재가치가 어떠함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양홍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제갈량은 그를 법정이 종군하여 공석이 된 촉군의 태수로 임명했고 그는 제갈량의 의도에 부합하는 믿음직하고 유능한 인재로 성장하였다. 익주에서 일어난 반란도 물론 이엄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그 뿌리가 얕은 것이어서 이엄은 불과 5천의 병력으로 수만 도적의 무리를 순식간에 격파하여 수괴들의 목을 베었고 고정의 소란도 가볍게 진압하였다. 이전 시기 익주 반란이 지속적으로 잘 소탕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이 시기 유비의 익주지배력이 확고해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릉대전 이후에도 반란이 한 차례 일어나긴 했지만 그 인물 자체가 촉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인물이었을 뿐이고 결국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다만 아직 확고히 촉한이 장악못한 남중의 반란이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제갈량이 해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